{"created":"2021-03-01T07:15:59.138829+00:00","id":54319,"links":{},"metadata":{"_buckets":{"deposit":"bf34e711-23e4-4ed1-9d7f-6c3e68a585ab"},"_deposit":{"id":"54319","owners":[],"pid":{"revision_id":0,"type":"depid","value":"54319"},"status":"published"},"_oai":{"id":"oai:repository.dl.itc.u-tokyo.ac.jp:00054319","sets":["43:53:5431:8438","9:504:5433:8439"]},"item_4_alternative_title_1":{"attribute_name":"その他のタイトル","attribute_value_mlt":[{"subitem_alternative_title":"막말기 히고의 〈번시〉 확립과 그 의미"}]},"item_4_biblio_info_7":{"attribute_name":"書誌情報","attribute_value_mlt":[{"bibliographicIssueDates":{"bibliographicIssueDate":"2020-03-31","bibliographicIssueDateType":"Issued"},"bibliographicPageEnd":"20","bibliographicPageStart":"1","bibliographicVolumeNumber":"23","bibliographic_titles":[{"bibliographic_title":"年報地域文化研究 = The Komaba journal of area studies, the University of Tokyo"}]}]},"item_4_description_5":{"attribute_name":"抄録","attribute_value_mlt":[{"subitem_description":"본고에서는 막말기 히고(肥後)의 정치동향을 분큐(文久) 1 년(1861) 12 월부터 동 3 년 4 월까지로 한정하여 존왕양이론의 고양과 번정부의 〈번시(藩是)〉 확정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.\n 막말기에 제번의 정치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분큐기 이후였다 . 중앙정치에서 발언권을 높여 나간 초슈(長州)와 사츠마(薩摩)를 비롯한 제번과 마찬가지로 히고가 중앙정국에 뛰어든 것 도 이 시기였다 . 당시 각 번은 중앙정국과의 관계를 심화하는 과정에서 번의 정치방침을 거번일 치 하에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. 히고의 경우 분큐 2 년 4 월에 〈번시〉가 결정됨으로써 막말기 정 치운동의 초기조건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.\n 번시라는 개념의 정의를 둘러싸고 학계에 일치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. 본고에서는 막말 정치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염두에 두고 , 〈번시〉란 〈전국정치와 자번(自藩)과의 관계를 표명 한 정치방침〉이라고 정의했다 . 일본의 정치질서가 붕괴하는 가운데 각 번 내에서 정쟁이 발생 하자 번정부는 이를 수습하고 단결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자번의 정치적 역량을 고려하여 전 국정치의 바람직한 모습을 설정해 가신들에게 제시했다. 실제로 막말기에 다수의 번에서 〈번시〉 가 제정되었다 .\n 본고의 제 1 장에서는 히고의 정치상황을 번정부와 근왕당의 대립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. 근왕당이 번정부에 제출한 건백서에는 근왕운동의 당위성과 군사 동원 등 번 차원의 참여를 요 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. 이는 번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기에 충분했고 , 번정부로 하여 금 중앙정치에 대한 입장표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. 제 2 장에서는 번정부가 근왕당의 정치적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보면서 , 번주 주도 하에 〈번시〉가 확정되기까지의 일련의 정치 과정을 분석했다 .\n 본고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분큐 2 년 4 월에 확정된 〈번시〉의 내용과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이다 . 히고번정부는 〈번시〉에 ‘천조 , 공의에 대한 충절(天朝公義え之御忠節)’ 을 명 시했다 . 천황(조정)을 천조로 명명하여 일본의 상징적 통합의 축으로 받들고 , 쇼군(막부)을 공의 즉 일본정치의 최고결정권자로 인정했다 . 쇼군이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 다고 규정한 것이다 . 이것은 근왕당이 쇼군과 다이묘의 주종관계를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 상대 화한 것과 상반되는 견해였고 , 여기에는 쇼군으로부터 대대로 은혜를 입고 있다는 자기인식이 막말기 히고의 〈번시〉 확립과 그 의미투영되어 있었다 . 특히 천조와 공의를 함께 충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은 막말기 히고의 정 치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.\n 히고의 〈번시〉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타번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. 본고에 서는 초슈의 ‘조정에 충절 , 막부에 신의 , 조종에 효도(朝廷へ忠節、幕府へ信義、祖宗へ孝道), 인슈(因州)의 ‘황조 , 막부 및 조종에 충효(皇朝幕府及祖宗ヱ忠孝)’ 를 들어 각각에 쓰인 용어 와 그 함의를 고찰했다 .\n 본고에서는 위의 논의를 토대로 향후 과제를 두 가지 제시했다 .\n 첫째는 막말기 히고의 구체적인 정치동향을 〈번시〉와 관련지어 고찰해 나가는 것이다 . 공무 대립과 대외정책상의 정쟁 등 혼란하고 복잡한 중앙정국에 대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〈번시〉가 어떠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는지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.\n 둘째는 히고의 사례를 다른 번과 비교하는 것이다. 각 번에서 〈번시〉가 어떻게 확정되었고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, 그것이 각각의 번이 전개한 정치운동에 어떠한 유사성과 차이점을 가져 왔는지 막말유신기의 정치변혁이라는 큰 틀 안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. 특히 막부에 대한 인식 의 변화가 각 번의 정치운동에 어떠한 다양성을 초래했고 , 그것이 왕정복고에 어떠한 영향을 미 치게 되었는지 해명하는 작업은 , 해당 시기의 정치과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. 여러 번들을 폭넓게 비교 , 분석해 나가는 방법을 통해 기존의 특정 번 중심의 역사상을 극 복하고 , 보다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시각에서 막말정치사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.","subitem_description_type":"Abstract"}]},"item_4_full_name_3":{"attribute_name":"著者別名","attribute_value_mlt":[{"nameIdentifiers":[{"nameIdentifier":"161532","nameIdentifierScheme":"WEKO"}],"names":[{"name":"오, 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